여름-5, 문학기행을 위한 베이스캠프 조태일 시문학관
- 작성일
- 2024.12.18 22:05
- 등록자
- 나종화
- 조회수
- 47
첨부파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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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테타로 권력을 쥔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했어요.
그것에 저항하는 반대파에 대해서는 무고한 사형선고조차
서슴치 않을 정도로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펼쳤습니다.
탄압이 거셀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지면서
청년 학생, 노동자, 지식인, 종교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선봉에 선 사람들이 다름아닌 문학인들입니다.
시인 조태일은 자신이 창간한 월간 시 전문지인 ‘시인’을 저항 문학인들의
활동공간으로 내가 주었습니다.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같은
시인들이 조태일의 품안에서 언어의 칼을 갈아 독재의 심장을 겨눴던 것이죠.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같은
민주투사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유신독재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발동되던 시절이라
조태일 시인도 거듭 투옥되면서 모진 고초를 당했어요.
정치인으로서 민주투사였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활약 못지않게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오늘날처럼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들이 국민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거의 온전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민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특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봉에 섰던 조태일 시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조태일 시인의 고향은 곡성입니다.
조태일 시인의 부친은 태안사 주지스님이었어요.
이를테면 결혼을 한 대처승이었던 거였죠.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하자 그 불길이 곡성까지 번지면서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어요.
반란군을 하룻밤 재워주었다는 명목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산골 마을 사람 전부가
희생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태일 시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급하게 광주로 피신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했든지 아버지는 조태일 시인에게 30년이 지난 후가 되면
그때 고향을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답니다.
조태일 시인은 어렷을적에 떠났지만 단 한순간도
고향 곡성 그리고 태안사를 잊지 못했다고
어려편의 시를 통해서 고백했습니다.
마침내 조태일 시인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는
묵언 수행을 마친 청화스님이 태안사 복원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죠.
이후 조태일 시인은 자주 곡성과 태안사를 들낙거립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고은, 황석영, 김지하 같은 입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따라갈 자가 없는 문인들과 함께 들낙거리면서
태안사가 더욱 알려지게 된거죠.
더불어서 그들을 따르는 독자들도 함께 드나들다 보니
태안사는 자연스럽게 문학기행 코스가 되었습니다.
조태일 시인은 죽자, 곡성군과 태안사에서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태안사 입구, 원래 스님들 다비장(화장터)하던 곳에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문학기행을 위한 베이스캠프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전라도 문학기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조태일 시문학관은 새롭게 단장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쯤 가보셨다 해도 다시 한번 다녀오세요.
태안사도 들러 보시구요.
● 조태일 시문학관 여행 정보
- 매주 월. 화요일 및 공휴일 휴관
- 개관시간 오전 9시~1700시(동절기) 18시00(하절기)
- 별관에 시집 전시관을 겸한 카페가 있음
● 추천 여행 코스
조태일 시문학관 -> 태안사 (도보로 왕복 2 시간 30분 소요)
● 주변 가볼만한 곳
- 대황강 출렁다리
- 독도사진 전시관
- 대황강 인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