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7,곡성문화유산 답사기 함허정과 제호정 고택
- 작성일
- 2024.12.20 19:47
- 등록자
- 나종화
- 조회수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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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함허정이 국가문화유산 명승으로 지정된 이후
답사여행객의 발걸음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인문학자로 변신한 개그맨 전유성씨도 제호정 고택에서
답사여행과 소규모 공연을 진행하였어요.
곡성의 문화유산이 널리 알려지고, 여러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가문화유산이 그렇지만 제호정 고택과 함허정에는 안내판에 씌어진 단편적인
지식 이상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깃들어 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죠?
좀더 유익한 답사여행을 위해 역사 여행부터 먼저 시작해보시죠.
이곳에 함허정과 군지촌정사를 세운 주인공 제호정 심광형은 세종대왕 왕비
소현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 청송심씨 출신입니다.
형과 아우가 과거를 보지 않고 음직으로 벼슬에 나갔을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었죠.
하지만 심광형은 벼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학과 경학에 있어서는 영호남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재였어요.
전라감사 김정국은 중종임금에게 심광형에게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렸지만 심광형은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그가 벼슬에 나가기를 그토록 꺼렸던 것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훈구파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어요.
그 대신 후진양성에 전념합니다.
중종 임금은 심광형의 뜻을 존중해서 명예직인 중학훈도로 임명합니다.
심광형은 인재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위한 학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재를 털어서 군지촌정사를 설립합니다.
당시 군지촌정사는 강의실. 기숙사. 손님을 위한 객사로 구성된
제법 규모를 갖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심광형 사후 살림집으로 개조하여 중수를 거듭하다가
지금의 제호정 고택이 된 것입니다.
심광형은 이후 군지촌정사 뒤쪽 동산위에 함허정을 짓습니다.
함허정에는 '채우고 비운다'는 의미를 지닌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겨 있어요.
그래서 함허정은 주로 수양과 교제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클래스가 있는 정자였어요.
함허정이 지어진 1543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대 최고 학자로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하서 김인후가
1543년에 옥과현 현감으로 부임합니다.
김인후의 부임과 함허정 건립은 상호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성출신인 김인후는 심광형과는 동갑으로 서로 막역한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김인후가 옥과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함허정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가 있던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함허정 아래 용바위 부근은 옥과현 현감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지역의 유지들을 초빙하여 인사를 나누는 향음례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돼 왔습니다.
옥과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불편했을텐데 그 전통을 이어온 이유는
아마도 처음 이곳을 찾은 김인후와 이곳의 주인 심광형을 존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인후는 훗날 인종으로 등극하는 세자를 가르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조선을 이상국가로 만들자고 굳은 약속을 합니다.
한편 김인후는 중종에게 향약을 부활하고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사림의
명예회복을 거듭 상소하였습니다.
훈구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성토했습니다.
그러자 김인후는 부모님을 봉양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조정을 떠나
옥과 현감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대학자인 김인후가 옥과에 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영호남의 선비들이 다투어 옥과현으로 몰려옵니다.
기묘사화로 인해 학풍은 땅에 떨어졌지만 학문에 대한 갈망은 최고조로
이른 상태였거든요.
김인후가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옥과 고을에서는 전에 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조용한 고장이었던 옥과현에 선비들이 몰려오면서
활발한 학문 교류가 일어났어요.
심광형의 군지촌정사도 전성기를 맞았어요.
학당에서 공부하는 선비들과 멀리서 찾아온 선비들이 어울려 토론을 벌이느라
밥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인후로 인해 시작된 옥과의 열기는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김인후가 옥과에 내려와 있는 동안 인종이 보위에 올랐습니다.
김인후는 나라를 바로 세울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인종은 김인후를 불러들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실권을 거머쥔 훈구파들이 엄청난 반발이 있었어요.
김인후는 다시 옥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만 있다가 인종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김인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몇 날 며칠을 슬퍼하다가 옥과현감도 그만두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실의에 찬 나날을 보냈습니다.
1549년 김인후는 처가가 있는 순창군 쌍치면 점암촌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함허정과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심광형과 교류도 매우활발해졌겠지요.
옥과의 선비들도 김인후가 세운 학당인 순창 훈몽제를 찾아 강론을 듣고
고봉 기대승이나 송강 정철 등 김인후 제자는 물론이고 율곡 이이같은
당대의 엘리트 학자들도 잇따라 심광형을 만나러 군지촌정사를 찾아옵니다.
이렇게 다시 함허정이 활기를 띄고 있을 때 심
광형은 갑작스런 병을 얻어 몸져 눕습니다.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던 김인후의 정성어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550년 41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비록 심광형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인 업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기묘사화로 침체 되었던 학문의 열기가 되살아나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함허정과 제호정 고택은 그런 이야기의 배경속에서 세워진 유산입니다.
이 글을 읽고 가시면 남다른 기분이 들 것입니다.
● 함허정 여행 추천코스
제호정 고택 -> 함허정 -> 제월섬
● 관련해서 가볼만한 곳
- 유팽로 장군 정렬각과 의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