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8, 조선의 개국공신 마천목 장군 묘역
- 작성일
- 2024.12.20 19:51
- 등록자
- 나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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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은 정안대군 이방원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승리하고
왕권을 확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조선 왕조 초창기 여전히 불안한 군권을 장악하여 세종대왕이 혁혁한 치적을
거둘 수 있도록한 일등 공신입니다.
마천목은 장흥 태생입니다.
하지만 외가가 있는 곡성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말년에 곡성으로 낙향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곡성의 인물입니다.
마천목의 묘역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에 조성돼 있습니다.
묘역은 마천목의 기리는 사당인 충정묘와 제사를 지내는 부속건물 영모재와
묘소로 구성돼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마천목의 생애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 15세때부터 곡성에서 살게된 마천목
마천목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 출신으로 장흥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를 갖춘 왜구가 장흥현으로 쳐들어오자
마천목 일가는 어쩔 수 없이 외가인 오곡면 오지리로 피난하였습니다.
그때가 마천목의 나이 열다섯이었습니다.
마천목의 외가인 평산 신씨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후손으로
무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입니다.
덕분에 마천목도 글공부를 하는 틈틈이 무예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마천목의 용맹스러움과 병든 어머니를 보살핀 효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도깨비살 전설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천목은 23세 때 응시한 무과 시험에 무난하게 급제하고
정8품 산원 직책을 받아 용장으로 이름을 날린 정지 장군 휘하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왜구와의 무수한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올렸습니다.
왕명에 의해 정지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이성계와 함께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을 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폭우로 이성계가 회군을 결정하자 정지도 이에 가담합니다.
그것은 우왕과 최영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정지도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성계와 뜻을 함께하였습니다.
반란은 성공하고 이성계가 권력을 쥐게 됩니다.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반대파를 취조하는 중에 정지의 이름이 등장하여 귀양을 갔다가
무고함이 밝혀져서 가까스로 풀려납니다.
또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이번에는 홍수로 인해 다시 풀려나
전라 절제사로 복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마천목을 비롯한 정지를 따르는 장수들은 곧장 개경으로
쳐들어가 이성계를 비롯한 무도한 무리들을 쓸어버리자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정지는 마천목과 휘하 장수들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리고 1391년 45세 아까운 나이로 호남의 명장 정지 장군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1392년 이성계의 등극과 함께 신권정치를 꿈구었던 정도전은 왕자들을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 놓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방원을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전라도 방어군은 정지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왕조에 대한 반감이
하늘로 칫솟고 있던 터였습니다.
이방원은 정지 장군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고 부하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마천목을 설득했습니다.
자신은 정지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정지 장군의 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전라도 절제사로 원대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운것도 자신이라는 것을
간곡하게 설명했습니다.
마천목은 결국 이방원의 말이 진심임을 믿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방원이 도성으로 복귀할 때 마천목이 큰 재목임을 알고 데려갔어요.
마천목에게 주어진 임무는 측근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 측에서 이방원의 움직임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어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마천목이 최고 적임자였습니다.
이방원의 배다른 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왕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때 왕자들에게 입궐하라는 어명이 있었습니다.
마천목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궁으로 들어가려는 이방원을 막고
먼저 선수를 치자고 하였습니다.
이방원이 동의 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이성계의 의붓동생인 도성을 지키는 이천수를
설득하여 도성 밖에 있는 군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고 정적인 정도전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방원의 호위를 전담한 마천목은 동생인 이방간과 박포가 공격해올거라는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고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한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 공로로 마천목은 3등 좌명공신을 하사받고 지위도 상장군으로 올랐습니다.
다른 공신들은 사치를 일삼고 위세를 부리다가 숙청을 당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지만 마천목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만 충실했습니다.
마천목의 지위는 더욱 올라가고, 명나라 사신의 임무까지 성공리에 수행하자
임금의 신임을 더욱 높아졌습니다.
비리를 저지른 부하를 취조하다가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태종 임금의 배려로
귀양지를 고향인 곡성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었습니다.
곡성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라절제사로 임명받아
평소 구상대로 무진주에 있던 전라방어군의 본진을 장흥으로 옮겨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세종이 즉위하자, 궁궐을 방어하는 내시위 절제, 병조판서 등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그때까지 불안정했던 조선의 군권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덕분에 세종대왕은 치세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다음에도 마천목은 도성의 동향을 지켜보다가
작은 낌새라도 있으면 곧장 올라가 해결하자 세종은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마천목이 곡성에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세종은 수시로 의복과 선물을
어의와 함께 보내 마천목의 건강을 살피고 위로했습니다.
1431년 2월 1일, 74세의 나이로 곡성에서 고이 잠들었습니다.
세종은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과 같다며 조정의 조회를 사흘간 폐하면서
애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장례절차와 묘소를 마련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조정이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하급 군관으로 출발하여 군부의 최고 지위에 오르고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다가 하늘이 준 수명을 다 누리고 영면에 든 마천목은 대단한 행운아입니다.
그렇게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눈앞 이익보다는 의를 중시하며
인덕을 베풀며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마천목 묘역 여행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산8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