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신숭겸 유적
문화유산종류 | 지정일 | 시대 | 규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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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기념물 | 2025. 2. 6. | 조선시대~근현대 |
곡성 신숭겸 유적은 신숭겸 관련 유적지 4곳을(용산재, 덕양사, 계마석, 영적비각)을 말한다. 하나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용산재는 고려 개국의 일등 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탄생하고 자란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적지이다.
신숭겸 장군은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탄생하여 유과(儒科)에 장원 급제하고 무예를 닦아 대장군으로서 고려 개국에 힘썼으며, 고려 태조 10년(927)에 대구 동수 전투에서 왕을 대신하여 전사함으로써 충절의 본보기가 되었다.
용산재는 조선 고종 5년(1868)에 부지를 마련하였고, 고종 34년(1897)에 유허비를 세웠다. 1929년에는 단을 설치하였고, 1960년에 용산재와 구룡문을 지었으며 매년 음력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낸다.
2000년 정부 지원과 후손의 성금으로 고쳐 지었으며, 2004년 동상을 세워 현재 규모로 성역화하였다.
덕양사는 곡성 출신으로 평산 신씨의 시조이며 고려 개국의 일등 공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고자 조선 선조 22년(1589)]에 지어졌다.
또한 이곳은 지방의 유림들이 모여 곡성 성황신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제사를 모시고, 유생들을 가르쳤던 교육 기관이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사우와 위판만은 보존되어 장절공의 영령이 지킨 것이라 하였다. 선조 36년(1603) 이후 사당을 비롯하여 서원을 다시 지었으며, 숙종 21년(1695)에 임금으로부터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은 역사적인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에 서원 훼철령으로 해체되었다가 1934년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계마석은 평산신씨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이 무예를 닦을때 말을 맸던 돌이라고 전한다. 신숭겸은 고려개국공신으로 목사동면 구룡리에서 태어나 이곳 삼태리에서 무예를 연마하였고, 927년(고려 태조 10)에 대구 동수 전투에서 왕을 대신하여 전사함으로써 충절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계마석의 규모는 현재 높이 365cm, 너비 47cm, 두께 40cm이며, 주형입석과 같은 형식이다. 계마석의 중하위에는 ‘壯節申公繫馬石(장절신공계마석)’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 돌은 현재까지 삼태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봉해 오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영적비는 신숭겸의 영혼이 이곳에 자취를 남겼다는 뜻으로 이름을 부른것으로 전한다. 3단의 방형 기단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고 한옥 팔작지붕형의 지붕석을 얹었다.
영적비의 내용은 신숭겸이 순국한 뒤 용마가 땅에 떨어진 신숭겸의 머리를 물고 고향 인접지인 태안사의 뒷산에 와서 3일간을 울다가 굶어 죽었고, 장군단을 마련해 제향을 했다. 1934년에 태안사 스님과 신현모를 비롯한 후손들이 모여, 장군의 머리가 묻혀 있다 전해지는 곳으로 가, 약 3m가량을 파내려가니 그곳에서 실제로 석함이 발견되었다. 이에 1937년 9월, 이 사실을 후손 현모가 비문을 지었고 함안인 조원규(咸安 趙元奎)가 글씨를 썼다.
위치 및 주변정보(주변10km이내)
곡성 신숭겸 유적 : 곡성군 목사동면 신숭겸로 226